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는 개봉 전부터 캐스팅만으로 기대를 모은 작품입니다. 직접 보고 나서 든 첫 생각은 "분위기는 분명 좋은데, 왜 이렇게 비어 있는 느낌이 드는 걸까"였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가다 보니, 결국 이 영화가 놓친 건 설명이 아니라 '납득'이었습니다.
미장센은 살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차가운 공기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이 영화의 미장센(mise-en-scène)이 꽤 잘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에 담기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색감, 인물 배치, 공간 구성 등을 아우르는 영화 연출 용어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배경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분위기를 절반쯤 완성시켜 줍니다. 차갑고 건조한 색 팔레트, 낡은 건물들 사이를 오가는 인물들, 그리고 말보다 눈빛으로 긴장감을 전달하는 장면들. 초반부를 보면서 "이거 꽤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액션 연출도 분명히 볼 만합니다. 류승완 감독 특유의 스타일인 '절제된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액션이 여기서도 유효하게 작동합니다. 하이퍼리얼리즘이란 현실을 극단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되 과장 없이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살리는 기법으로, 액션 장르에서는 피하고 싶은 충돌의 감각을 관객이 직접 느끼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화려하게 튀기보다는 묵직하게 박히는 방식이라 전반적인 톤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조인성, 박정민, 박해준, 신세경이라는 배우 조합도 기대감을 실망시키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면서 조금씩 뭔가 어긋나는 느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장면 하나하나는 충분히 잘 만들어졌는데, 그 장면들이 연결될 때 이상하게 힘이 빠집니다. 각 씬(scene)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씬과 씬 사이를 이어주는 감정의 인과관계가 약하다는 인상이 지속됩니다. 저는 이런 류의 영화를 꽤 많이 봐왔는데, 이 감각은 꽤 뚜렷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가 가진 비주얼의 강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블라디보스토크의 공간감을 활용한 차갑고 고립된 분위기 연출
- 과장 없이 현실적 긴장감을 살린 액션 시퀀스 구성
- 인물 간 감정을 대사 없이 시선과 거리로 표현하는 미장센 활용
서사 구조의 균열, 그리고 베를린과의 비교
제 경험상 이런 느낌이 드는 영화는 대부분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에 문제가 있습니다. 서사 구조란 이야기를 구성하는 인과관계의 뼈대로, 인물이 어떤 이유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흐름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뼈대가 단단하지 않으면, 개별 장면이 아무리 좋아도 전체가 헐거워 보입니다.
'휴민트'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조인성과 신세경의 관계입니다. 이 두 인물의 관계는 이야기 전체에서 감정적 축으로 작동해야 하는 구조인데, 그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충분히 쌓이지 않습니다. 조인성의 캐릭터가 결국 명령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예상을 빗나갔다는 게 아니라, 납득이 안 된다는 의미에서요. 그 선택을 할 만큼의 감정이 앞에서 충분히 쌓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비교가 되는 작품이 류승완 감독의 전작 '베를린'입니다. '베를린'의 하정우 캐릭터 역시 조직의 명령을 어기는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납득이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지키려는 것이 '아내', 즉 부부 관계라는 이미 강한 서사적 명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객이 그 감정의 무게를 이해하기 때문에 선택에 설득이 됩니다. 더불어 한석규 캐릭터가 그를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상황의 무게를 이해한 위에서 나온 선택이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인물이 이야기를 통해 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시나리오 용어입니다. '베를린'의 하정우는 이 아크가 감정의 축과 함께 선명하게 그려졌고, '휴민트'의 조인성은 그 아크가 충분히 그려지기 전에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관객 입장에서는 그 선택이 인물의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의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그게 이 영화 전체의 몰입을 가장 크게 깨는 지점이라고 봅니다.
영화 서사의 설득력에 관해서는 이미 다양한 연구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인물의 선택이 관객의 공감을 얻으려면 행동 동기(motivation)와 정서적 선행 경험이 충분히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은 시나리오 이론의 기본 전제입니다(출처: 한국영화아카데미). 국내 영화 산업에서도 이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한국영상자료원의 연구에 따르면 관객 몰입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시각적 연출보다 인물의 동기와 감정 흐름의 일관성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다 보고 나서 남는 건 분위기와 배우, 그리고 몇몇 액션 장면입니다. 이야기가 남기보다 장면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연출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건 분명히 느꼈습니다. 다만 이번 작품은 그 연출력이 서사의 균열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베를린' 세계관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 연결점을 찾는 재미로 볼 만하고, 류승완 감독 스타일의 액션을 좋아하는 분께도 완전히 실망스러운 작품은 아닙니다. 다만 이야기에서 감정의 무게를 기대한다면, 그 기대는 절반쯤 내려놓고 극장에 가시는 걸 권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