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이와 흥수, 사랑을 대하는 방식이 정반대인 두 인물이 동거를 시작한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제목만 보고 기대했던 로맨스와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마주했습니다. 사랑 이야기인데, 연애 이야기는 아닌 것. 그 묘한 거리감이 오히려 이 영화를 더 오래 붙잡아두었습니다.
사랑의 방식: 받아들이는 쪽과 밀어내는 쪽
영화를 보면서 제가 처음 떠올린 개념은 애착 유형(Attachment Style)이었습니다. 애착 유형이란 사람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의 근본적인 패턴을 의미하는데, 심리학에서는 크게 안정형, 회피형, 불안형으로 나눕니다. 제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고, 흥수는 사랑 자체를 밀어내는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흥수를 보면서 회피형 애착의 전형을 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어느 쪽이 맞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이는 사람을 받아들이면서 상처도 함께 안습니다. 흥수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 사랑 자체를 거부합니다. 둘 다 나름의 방식으로 20대를 버텨냅니다. 이 대비 구조가 이 영화의 중심 서사를 이루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조가 꽤 솔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랑을 로맨스(Romance)의 관점에서만 보려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영화에서 로맨스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의 레이어(layer)를 봤습니다. 레이어란 하나의 감정 위에 또 다른 감정이 겹쳐 쌓인 구조를 의미합니다. 제이가 사람을 받아들일 때 단순히 좋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내면의 결핍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흥수가 밀어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 다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읽혔습니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일수록 친밀감을 느낄수록 거리를 두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흥수의 행동 패턴이 이 연구 결과와 정확히 겹쳐 보였고, 그래서 저는 이 인물이 단순한 캐릭터 설정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두 인물의 사랑 방식을 나누는 핵심 기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이: 감정에 열려 있고, 상처를 감수하면서도 관계에 뛰어드는 유형
- 흥수: 감정을 통제하고, 관계 자체를 제한함으로써 상처를 원천 차단하는 유형
- 공통점: 둘 다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의 내면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저는 솔직히 이 두 캐릭터를 보면서 제 20대를 꽤 많이 떠올렸습니다. 한때는 제이처럼 무조건 받아들이다가 지쳤고, 어느 순간부터는 흥수처럼 선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그 경계 어딘가에서 이 영화가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었습니다.
우정과 성장 서사: 이해하지 않아도 옆에 있는 관계
이 영화를 성장 서사(Coming-of-age narrative)로 분류하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분류에 동의하면서도 조금 다르게 읽혔습니다. 성장 서사란 인물이 갈등과 경험을 통해 내면적으로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이야기 구조를 의미합니다. 보통 이 장르에서는 인물이 뚜렷하게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그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제이와 흥수는 서로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이해하려고는 하지만, 억지로 맞추지 않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보통 우정을 다루는 영화에서는 한쪽이 다른 쪽을 변화시키는 서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강요가 없습니다. 그냥 다른 채로, 옆에 있습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캐릭터 아크란 한 인물이 이야기 시작부터 끝까지 겪는 내면적 변화의 궤적을 의미합니다. 이 영화에서 두 인물의 아크는 극적이지 않습니다.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보고 나면 이상하게 두 사람의 감정이 오래 남습니다. 큰 사건이 없었는데도, 그 관계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저는 이게 이 영화의 가장 솔직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도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오랜 친구와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이유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냥 각자의 모습을 그대로 두면서 옆에 있어줬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맞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 한국 청춘 영화의 주요 흐름 중 하나는 극적 갈등 대신 일상의 누적을 통해 관계의 밀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이 영화도 그 흐름 안에 있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쏟는 장면보다, 조용히 같은 공간에 있는 장면들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이 영화를 "연애 영화"로 기대하고 들어간 관객과 "관계 영화"로 열고 들어간 관객은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본 것처럼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후자에 가까웠고, 그래서 기대치와 실제가 잘 맞았습니다. 사랑에 진심인 제이에게 이입하는 분들도 있고, 사랑을 밀어내는 흥수에게 더 끌리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 이입의 방향에 따라 이 영화의 결말이 주는 감각도 달라집니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성장이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면서 그 옆에 누군가를 둘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게 이 영화에서 저한테 가장 오래 남은 문장입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라면, 로맨스를 기대하기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 자체를 따라간다는 마음으로 보시기를 권합니다. 어느 인물에게 더 이입하게 되는지를 의식하며 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겁니다. 제 경우에는 흥수 쪽이었는데, 그 이유를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생각했습니다.